요한복음 14:1-31

14  “여러분은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 믿음을 나타내고+ 나에게도 믿음을 나타내십시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러 갑니다.+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면, 다시 와서 여러분을 맞이하여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습니다.”  도마가+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우리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있고, 또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빌립이 그분에게 말했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빌립,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여러분과 함께 있었는데도 당신은 나를 모릅니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까? 10  당신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하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생각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11  내가 아버지와 함께하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한 말을 믿으십시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십시오.+ 12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누구든지 나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며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입니다.+ 13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해 주겠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그것을 해 주겠습니다. 15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다른 돕는 자를 여러분에게 주셔서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17  그것은 진리의 영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함께 머무르며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18  나는 여러분을 홀로 버려두지 않고 여러분에게 올 것입니다.+ 19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겠지만 여러분은 나를 볼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여러분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20  그날에 여러분은 내가 아버지와 함께하고 여러분이 나와 함께하며 내가 여러분과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1  누구든지 내 계명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그에게 분명히 보여 줄 것입니다.” 22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그분에게 물었다. “주여, 왜 우리에게는 자신을 분명히 보여 주려고 하시면서 세상에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23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거할 것입니다.+ 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듣고 있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25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말했습니다. 26  그러나 돕는 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줄 것입니다.+ 27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남겨 둡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근심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28  ‘내가 떠났다가 여러분에게 돌아온다’라고 한 내 말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29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에 여러분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30  나는 더 이상 여러분과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통치자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 수 있도록,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대로 하고 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여기를 떠납시다.”

각주

연구 노트

거할 곳: 그리스어 모네는 이 구절과 요 14:23에만 나온다. 요 14:23에서는 “거하다”로 번역되었다. 세속 문헌에서 이 단어는 여행자가 쉬어 가는 곳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하늘에 있는 영구적인 거할 곳을 가리킨다는 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게 될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이 영구적으로 거할 곳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피의 가치를 바치셔야 했다. (히 9:12, 24-28)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뒤에야 사람이 하늘에 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빌 3:20, 21.

여러분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러: 이러한 준비에는 예수께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피의 가치를 바침으로 새 계약을 유효하게 하시는 일이 포함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받으시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 후에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제자들이 하늘로 부활되는 일이 시작될 것이었다.—살전 4:14-17; 히 9:12, 24-28; 벧전 1:19; 계 11:1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이신 이유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기도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이시기도 하다. (요 16:23; 롬 5:8) 예수께서 진리이신 이유는 그분이 진리를 말씀하셨고 진리와 일치하게 생활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많은 예언을 성취시키셨는데, 그러한 예언들은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서 그분이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보여 준다. (요 1:14; 계 19:10) 그 예언들은 “그분에 의해 ‘예’가 되었다[또는 “성취되었다”].” (고후 1:20) 예수께서 생명이신 이유는 그분이 대속을 통해 인류가 “참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딤전 6:12, 19; 엡 1:7; 요1 1:7) 또한 그분은 낙원에서 부활되어 영원히 살 전망을 갖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생명”이 되실 것이다.—요 5:28, 29.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빌립은 고대에 모세, 엘리야,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서 본 것처럼, 어떤 식으로인가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보게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출 24:10; 왕상 19:9-13; 사 6:1-5.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입니다: 요 14:8에서 빌립이 한 말을 보면, 그는 고대에 모세, 엘리야,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서 본 것처럼 어떤 식으로인가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보게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출 24:10; 왕상 19:9-13; 사 6:1-5) 그러한 환상에서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을 보았다. (출 33:17-23; 요 1:18) 예수께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 빌립이 그러한 환상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이미 보았다는 점을 밝혀 주셨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성품을 완벽하게 반영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는 것과 같았다. (마 11:27) 제자들은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성품과 뜻과 목적을 이해했으며, 그렇게 하여 ‘아버지를 보았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를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친구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고, 동정심에서 우러나와 아픈 사람을 고쳐 주고,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느껴 눈물을 흘리고, 강력한 가르침을 베푸시는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여호와께서 바로 그와 같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볼 수 있다.—마 7:28, 29; 막 1:40-42; 요 11:32-36.

내 생각대로: 또는 “스스로”. 직역하면 “나로부터”.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수석 대표자로서 언제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지시하시는 대로 말씀하신다.

그보다 더 큰 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자신보다 더 큰 규모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오랜 기간 동안 전파할 것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던 일을 제자들이 계속할 것임을 알고 계셨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여기서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알려 주고 계신다. 이전에는 여호와께서 누군가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을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할 때 모세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죽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밤에, ‘내 이름으로 청하라’는 표현을 4번 언급하심으로 기도하는 새로운 방식을 알려 주셨다. (요 14:13, 14; 15:16; 16:23, 24) 예수께서 자신의 완전한 생명을 대속물로 바치셔서 인류를 사셨으므로, 그분은 인류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시다. (롬 5:12, 18, 19; 고전 6:20; 갈 3:13) 그분은 그처럼 자신을 바치심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법적 중개자, (딤전 2:5, 6) 인류를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되셨다. (행 4:12) 따라서 인류는 예수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히 4:14-1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수행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다.

청하면: 이 표현은 일부 고대 사본들을 따른 것이며, 요 15:1616:23의 표현과도 조화를 이룬다. “나에게 청하면”으로 되어 있는 고대 사본들도 있다.

다른 돕는 자: 이 표현을 보면 제자들에게 이미 “돕는 자”가 있었음을, 다시 말해 예수께서 그들의 “돕는 자” 역할을 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돕는 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요1 2:1에서 예수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 떠난 뒤에 하느님의 영 즉 활동력이 또 다른 돕는 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돕는 자: 또는 “위로자; 격려하는 자; 변호하는 자”. “돕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서 성령의 역할(요 14:16, 26; 15:26; 16:7)과 예수의 역할(요1 2:1)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을 받아 누군가의 곁으로 가서” 도움을 베푸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을 돕는 자로 언급하시면서, 이 돕는 자가 “가르치고”,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4:26; 15:26; 16:7-15) 그분은 인격체가 아니거나 생명이 없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의인법이 사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혜, 죽음, 죄, 과분한 친절에 대해 묘사할 때 의인법이 사용되었다. (마 11:19; 눅 7:35; 롬 5:14, 17, 21; 6:12; 7:8-11) 그중 어느 것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하느님의 영이 비인격적인 힘이나 사물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그 영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마 3:11; 행 6:3, 5; 13:52; 고후 6:4-8; 엡 5:18) 일부 사람들은 이 “돕는 자”를 지칭할 때 그리스어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이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요 14:26) 하지만 “돕는 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남성형이므로 “돕는 자”가 하는 일을 묘사할 때 그리스어 문법에 따라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한다. (요 16:7, 8, 13, 14) 그런가 하면 “영”(프뉴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중성이므로, “영”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요 14:17 연구 노트 참조.

영: 또는 “활동력”. 그리스어 프뉴마는 중성이므로 그것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 이 그리스어 단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로 사용되든 공통점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개 그 힘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있는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용어 설명 참조) 이 문맥에서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영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동일한 표현이 요 15:26; 16:13에도 나오는데, 요 16:13에서 예수께서는 “돕는 자”(요 16:7) 즉 “진리의 영”이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보지도 ···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 두 번 나오는 “그것”은 그리스어 중성형 대명사 아우토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을 가리키는데, “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프뉴마) 역시 중성형이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돕는 자: 또는 “위로자; 격려하는 자; 변호하는 자”. “돕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서 성령의 역할(요 14:16, 26; 15:26; 16:7)과 예수의 역할(요1 2:1)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을 받아 누군가의 곁으로 가서” 도움을 베푸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을 돕는 자로 언급하시면서, 이 돕는 자가 “가르치고”,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4:26; 15:26; 16:7-15) 그분은 인격체가 아니거나 생명이 없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의인법이 사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혜, 죽음, 죄, 과분한 친절에 대해 묘사할 때 의인법이 사용되었다. (마 11:19; 눅 7:35; 롬 5:14, 17, 21; 6:12; 7:8-11) 그중 어느 것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하느님의 영이 비인격적인 힘이나 사물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그 영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마 3:11; 행 6:3, 5; 13:52; 고후 6:4-8; 엡 5:18) 일부 사람들은 이 “돕는 자”를 지칭할 때 그리스어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이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요 14:26) 하지만 “돕는 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남성형이므로 “돕는 자”가 하는 일을 묘사할 때 그리스어 문법에 따라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한다. (요 16:7, 8, 13, 14) 그런가 하면 “영”(프뉴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중성이므로, “영”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요 14:17 연구 노트 참조.

영: 또는 “활동력”. 그리스어 프뉴마는 중성이므로 그것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 이 그리스어 단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로 사용되든 공통점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개 그 힘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있는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용어 설명 참조) 이 문맥에서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영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동일한 표현이 요 15:26; 16:13에도 나오는데, 요 16:13에서 예수께서는 “돕는 자”(요 16:7) 즉 “진리의 영”이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보지도 ···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 두 번 나오는 “그것”은 그리스어 중성형 대명사 아우토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을 가리키는데, “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프뉴마) 역시 중성형이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홀로: 또는 “고아로”.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르파노스는 문자적으로 부모가 없는 사람 즉 “고아”를 가리키는데, 약 1:27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친구나 보호자나 주인의 지원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아무런 도움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 다대오라고도 하는 사도 유다를 가리킨다.—마 10:3 연구 노트 참조.

다대오: 눅 6:16과 행 1:13에 나오는 사도들의 이름 가운데는 다대오라는 이름이 없고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나온다. 이 점을 볼 때 다대오는 요한복음에서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로 언급된 사도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요 14:22) 때때로 유다가 아니라 다대오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배반자 가룟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거할: 요 14:2 연구 노트 참조.

거할 곳: 그리스어 모네는 이 구절과 요 14:23에만 나온다. 요 14:23에서는 “거하다”로 번역되었다. 세속 문헌에서 이 단어는 여행자가 쉬어 가는 곳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하늘에 있는 영구적인 거할 곳을 가리킨다는 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게 될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이 영구적으로 거할 곳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피의 가치를 바치셔야 했다. (히 9:12, 24-28)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뒤에야 사람이 하늘에 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빌 3:20, 21.

돕는 자: 또는 “위로자; 격려하는 자; 변호하는 자”. “돕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서 성령의 역할(요 14:16, 26; 15:26; 16:7)과 예수의 역할(요1 2:1)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을 받아 누군가의 곁으로 가서” 도움을 베푸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을 돕는 자로 언급하시면서, 이 돕는 자가 “가르치고”,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4:26; 15:26; 16:7-15) 그분은 인격체가 아니거나 생명이 없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의인법이 사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혜, 죽음, 죄, 과분한 친절에 대해 묘사할 때 의인법이 사용되었다. (마 11:19; 눅 7:35; 롬 5:14, 17, 21; 6:12; 7:8-11) 그중 어느 것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하느님의 영이 비인격적인 힘이나 사물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그 영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마 3:11; 행 6:3, 5; 13:52; 고후 6:4-8; 엡 5:18) 일부 사람들은 이 “돕는 자”를 지칭할 때 그리스어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이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요 14:26) 하지만 “돕는 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남성형이므로 “돕는 자”가 하는 일을 묘사할 때 그리스어 문법에 따라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한다. (요 16:7, 8, 13, 14) 그런가 하면 “영”(프뉴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중성이므로, “영”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요 14:17 연구 노트 참조.

돕는 자: 또는 “위로자; 격려하는 자; 변호하는 자”. “돕는 자”로 번역된 그리스어(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서 성령의 역할(요 14:16, 26; 15:26; 16:7)과 예수의 역할(요1 2:1)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을 받아 누군가의 곁으로 가서” 도움을 베푸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비인격적인 힘인 성령을 돕는 자로 언급하시면서, 이 돕는 자가 “가르치고”,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인도하고’, ‘말하고’, ‘듣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4:26; 15:26; 16:7-15) 그분은 인격체가 아니거나 생명이 없는 것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의인법이 사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혜, 죽음, 죄, 과분한 친절에 대해 묘사할 때 의인법이 사용되었다. (마 11:19; 눅 7:35; 롬 5:14, 17, 21; 6:12; 7:8-11) 그중 어느 것도 인격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하느님의 영이 비인격적인 힘이나 사물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그 영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마 3:11; 행 6:3, 5; 13:52; 고후 6:4-8; 엡 5:18) 일부 사람들은 이 “돕는 자”를 지칭할 때 그리스어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성령이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요 14:26) 하지만 “돕는 자”에 해당하는 단어가 남성형이므로 “돕는 자”가 하는 일을 묘사할 때 그리스어 문법에 따라 남성형 대명사가 사용되어야 한다. (요 16:7, 8, 13, 14) 그런가 하면 “영”(프뉴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중성이므로, “영”을 지칭할 때는 중성형 대명사가 사용된다.—요 14:17 연구 노트 참조.

그: 13, 14절의 “그”는 요 16:7에 나오는 “돕는 자”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리스어로 중성형인 성령 즉 비인격적인 힘을 의인화하여 (그리스어로 남성형인) “돕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돕는 자: 또는 “위로자; 격려하는 자; 변호하는 자”.—요 14:16 연구 노트 참조.

그가: 여기서 “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지시 대명사 에케이노스는 남성형으로 되어 있으며 돕는 자를 가리킨다. “돕는 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역시 남성형이다.—요 14:16; 16:13 연구 노트 참조.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보다 더 크시고 더 큰 권위와 더 높은 지위를 갖고 계시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인정하셨다. (마 4:9, 10; 20:23; 눅 22:41, 42; 요 5:19; 8:42; 13:16)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도 사도들은 아버지께서 예수와 구별되는 더 높은 지위를 갖고 계신 것으로 묘사했다. (고전 11:3; 15:20, 24-28; 벧전 1:3; 요1 2:1; 4:9, 10) 여기서 “더 크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메이존)는 “크다”에 해당하는 단어(메가스)의 비교급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월하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마 18:1; 23:17; 막 9:34; 12:31; 눅 22:24; 요 13:16; 고전 13:13.

세상의 통치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요 12:31; 16:11에도 나오는데 사탄 마귀를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 “세상”(그리스어 코스모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고 그분의 뜻과 어긋나게 행동하는 인간 사회를 가리킨다. 이 불의한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며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다.” (요1 5:19) 사탄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세력들”은 보이지 않게 활동하는 “이 어둠의 세상 통치자들[그리스어 코스모크라토르의 한 형태]”이다.—엡 6:11, 12.

그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또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직역하면 “그는 내 안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에게는 사탄이 이용할 만한 불완전성이나 잘못된 욕망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사탄은 그러한 것을 이용해 그분을 하느님을 섬기는 데서 돌아서게 만들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법률 문서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 관용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 관용구는 “그는 나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다”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경우와는 달리, 마귀는 유다에게 들어가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요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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